[리뷰] 봉팔이 이야기를 해봅시다 (feat. 랑데뷰)

*네이버 일요웹툰 랑데뷰의 1부 스포일러가 가득 함유되어 있습니다.

*원작 보고오시면 백배쯤 재밌는 리뷰. https://comic.naver.com/webtoon/list?titleId=778967&weekday=sun

*박봉팔을 어쩐지 안쓰럽게 이해하고 지극히 관대하게 보는 시선이 함유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까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부분에서…제목 그대로입니다. …어쨌건, 봉팔이 이야기를 해보자.

왜 하필 박봉팔인가

랑데뷰엔 제법 괜찮은 캐릭터가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괜찮다’ 는 취급을 받는 사람일 수도 있고, 내 친구로 두고 싶은 캐릭터일 수도 있고, 서사상 존재만으로 분위기를 풀어주는 캐릭터일 수도 있고, 현실에 있었다면 내가 사귀었다! 는 취급을 받는 캐릭터도 있죠.

그런데 저는 랑데뷰를 보는 내내 박봉팔 얘기가 너무 하고 싶었습니다. 댓글에는 심심하면 봉팔쓰, 이십팔세의 욕이 올라오곤 하며 심지어 저도 대부분의 댓글에 동의합니다. 하민이와 봉팔이의 연애사는 재밌기는 하지만 역시 두사람이 친구로 남았으면 싶기도 합니다. 두 사람 자신을 위해서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사귄 뒤의 미래가 독자입장에선 ‘마치 그린듯이’ 보이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그 그림은 독자 자신의 경험에 빗댄 그림이며 현실이 아닙니다. 작품의 진실성과도 관련없고, 실제로 그런 미래가 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죠.

랑데뷰의 좋은 점은 그런 불확실함을 그대로 담고자 노력한 작가님의 섬세함에 있습니다. 예측 불허이기에 재밌고, 재밌지만 고통스럽기도 해요. 이야기로서 충실하고, 보는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관리된 또다른 현실입니다. 결국 랑데뷰는 작가님이 철저하게 직조하고 관리한 정원과도 같습니다. 현실에 가깝지만 멀고, 멀지만 때로 엄청나게 가깝다고 느껴질 때도 있죠.

가장 현실과 유리되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인물들이 각자의 서사를 담당한 만큼만 다면적인게 드러낼 때 그렇습니다. 충분히 다채롭지만, 주제에 적당한 면까지만 다채롭거든요. 고통스러워해도 언젠가 성장하고, 슬퍼하다가도 위로받습니다. 에피소드의 분량에 맞춰서요. 그만큼 서로를 위해 분배된 역할도 아주 뚜렷합니다. 누가 누굴 위로하는지, 누가 누굴 비난하는지, 누가 누굴 사랑하는지, 어떤사람이 어설프면 어떤 사람은 딱 그만큼 뛰어나고. 다만 그 역할을 묘사하는 방식에 깊이가 있을 뿐이지요. 밉다가도 안쓰럽고, 너무 좋고, 안쓰럽다가도 미운 수준을 적절히 유지합니다. 친구 관계처럼요.

이 얘기를 왜하나면… 박봉팔은 그 중에서 놀랍게도 소연이보다도 더 튀어나온 압정같을 때가 있거든요. (물론 그냥 주인공이 하민이어서 더 그래보이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 1부의 로맨스 주축이긴 하니까요.)

봉팔이는 인물 설정의 밸런스면에서 조금 정도를 벗어나버린 녀석이 아닐까요. 인물이 지닌 다면이 랑데뷰 내부의 인물들에게 제각각… 2~3개씩 할당되어있다 치면, 박봉팔에게는 4개쯤 있는 셈입니다.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이해하고 싶지 않아하는 면과 이해할 수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면, 때로 좋은 사람 같은면이 박봉팔에겐 남들보다 흐린 경계로 섞여 있는 것만 같아요. 그래서 종종 독자들은 박봉팔을 싫어하거나, 불편해합니다.

랑데뷰에서 내내 강조하듯 인간은 결코 단 한면으로 판단할 수 없고,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점도 있습니다. 우린 그런 모든 좋은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면을 이해하고 싶어하고, 내게 해를 끼친 사람을 나쁜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해요. 박봉팔 진짜 나쁘기도 했지 않나? …

그런데 말이죠. 이런저런 장광설을 내뱉어두었지만 각설하고…무엇보다 저는…

랑데뷰를 보는 내내 …

봉팔이의 인생사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너도 박봉팔이냐?

아닐까요? 맞을까요?

그건 중요한 얘기가 아니니 진짜 봉팔이 이야기를 해보아요.

일단, 박봉팔은 대체 왜그럴까요? 왜 하민이한테 그렇게 멍청하게 굴까요? 왜 그렇게 모든 일에 경솔하고, 왜 그렇게 상처받길 두려워하면서 제가 저지른 일의 앞날은 모르는 놈처럼 갈팡질팡하고, 왜 스스로의 마음도 모르고 있다가 다 늦은 타이밍에 알아차릴까요? 왜 그렇게 쉽게 변할까요? 왜 그렇게 도망치기만 할까요? 왜 그렇게 악의도 없이 개자식일까요?

댓글에 뜰 때마다 저는 왜 그러는지 너무 잘 알겠어서 입이 근질거렸습니다. 어쩌면 다들 아는데 구구절절 얘기하긴 뭣해서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저는 이런 얘기하는 걸 좋아해서.

얘기하기전에 또 랑데뷰의 좋은 점을 말해볼게요. 다시금 인물의 다면성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랑데뷰를 보는 내내 이 작품의 대중성이 얼마나 빈번히 종이한장을 사이에 두고 각개전투를 벌이곤 하는지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게 매력이죠.

예를 들어…혜성이는 하민이를 가장 편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며, 친구가 계단에서 떨어지면 무의식중에 몸을 내던지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사회성이 떨어지기에 상대의 기분보다 소위 팩트를 중시하죠. 그렇게 막말에 가까운 ‘맞는 말’을 하곤 합니다. 맞지만 틀렸다는 표현이 어울리기도 하고, 동시에 주변상황을 일체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혹은 그러고 싶어하고, 그럴 수 있기 때문에) 때로는 가장 필요한 말을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민이는 지금으로선 혜성이가 편하지만, 편해지기 전엔 빡쳐했습니다. 인물이 논란의 한중간에 떨어질 대사를 하게 만들었다가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것. 이게 작가님의 능수능란함…이겠지만 그만큼 대중성은 오락가락하다 실종될 뻔하고 또 돌아오고… 반복하죠. 그게 참 신기하고 재밌었습니다.

가장 재밌는 건… (다시 돌아와서) 박봉팔이 언제나 메인 스트림에 어울리는 방식의 남자주인공에서 탈락하고야 만다는 겁니다. 1부 내내 주인공들은 대외적인 모습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환상에 빠지게 하고, 독자들은 당연히 이전까지 다른 작품들을 향유하던 방식으로 캐릭터들을 사랑하게 되었을텐데요… (저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그게 작품의 지향점인줄.) 거기서 박봉팔은 독자들을 ‘나 남주인공이야!’ 하는 외모와 적당한 플러팅, 장난질로 끌어왔다가 빌딩 옥상에서 던지듯 떨어뜨리고, ‘농담이야, 번지점프였어’ 하며 끌어 올렸다가 다시 줄없이 밀치는 인물입니다. 물론 독자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요.

저는 거기서 슬프게도 이 녀석에게 뼈저리게 공감하고야 말았습니다…

박봉팔은 일단 한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가볍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 랑데뷰의 인물 표현은 언제나 다면성을 목적에 두고, 봉팔이는 그 면면 사이의 경계가 흐린 만큼이나 그 가벼움이 밑바닥까지 악랄해지지 않습니다. 그게 박봉팔이 소위 독자를 답답하게 만드는 인물인 이유지요. 물론 일을 여기까지 키웠고, 하민이를 상처입혀 영원히 고향에 처박히게 만들 뻔했고, 하여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책임 했으며 사랑 그 자체를 가볍게 인식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 을 했죠. 그건 한편으론 죄악이며, 한편으론 박봉팔이란 인물의 인간성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딱 그 정도. 선의와 선의를 추구하는 인간들, 그들의 다정함으로 극복될 수 있으나 제법 커다란 상처를 남기는. 그게 박봉팔이 살면서 저지를 수 있는 악랄함입니다. (심지어 그러려던 게 아니었다는 점이…)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먹을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일단 1부 동안은 그랬네요.

하지만 봉팔이는 정말 가벼운가요?

어쩌다 가벼워졌을까요? 가벼워지려고 아등바등하다, 해내고 보니 본래 진지하게 살다가 무참하게 상처입은 시절로 돌아갈 마음이라곤 안들었던 건 아닐까요? 진지함이 오랜 옛날의 갈망이나 상실을 다신 채워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 아닐까요?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단순히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상처입었고, 그걸 치유하면 싹 나아서 개심하는’ 인물인가요? 정말 봉팔이에게 상처가 엄청나게 큰가요? 인생 전체를 휘둘릴 만큼?

이런 건 인물을 위한 변명이 못되지만, 그런 지레짐작들을 기반으로 생각해보아요.


과거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인간,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인간

박봉팔은 28세가 되고서도 상처입거나, 자신의 기대감을 배신당하는 순간이 오면 중학생 무렵으로 회귀합니다. 지은이와 얘기하다말고, 혼이 나고 있자니 답답했는지 ‘날 좋아하지 않는 걸 드러내려고 더 함부로 대하는 것 아냐?’ 이런 말을 하잖아요? 아니, 너희가 지금 몇살인데… 이건 정말 뜬금없는 얘기같지만, 또 그 상황이 싫어서 면피하는 대사일 수도 있지만.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이 인물이 아직도 과거의 그 순간을 기반으로 판단하곤 하며, 지금의 판단 기준이 그 무렵에 마련되었다는 단서이기도 합니다.

일련의… 부모님이 마찰을 일으키고 방치되었던 6학년 무렵을 지나, 지은이에게 고백한뒤, 지은이가 자신이 아웃팅 당할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우는 것을 목격하기까지~의 내용은 봉팔의 사고회로가 형성된 과정을 가장 짧고 굵게 요약해 보여주는 서사예요. 이제 그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봉팔이가 했던 일들을 보면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아직 최선을 다한 시도도, 좌절도 겪어보지 않았던 때에는 도전하죠. (연예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도전이 실패하면 견딜 수 없는 혼란에 빠집니다. 다시 한번 자길 일으켜 세워준 인물을 만나지만(이지은), 지은이 자신의 고백에 괴로워하니 이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한이 있어도(이전보다 노력의 방향이 얄팍하고, 노련해집니다. 여자친구를 사귑니다. 이후에도 반복되는 레파토리예요. 하민이가 자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다른 여자랑 만나고, 미리부터 실망하지 않으려고 온갖 굴을 파두고 도망다니죠. 뭣보다 본인 시선에 여자들은 자길 쉽게 좋아하고, 쉽게 실망해왔을테고요.) 지은이 곁에서 친구로 남습니다.

거절당하는것, 사랑했다가 잃는 것. 진지하게 일방향의 사랑을 보내는 것이 상대에겐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것들은 본인이 근원을 잊는 한이 있어도 감정의 뿌리에서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박봉팔은 단 하나의 과거사로 만들어진 인물이 되고 맙니다. 아픔은 물론 인생 전체에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지만, 사람이 경험 하나로 결정되고 어느 순간 미래까지 완성되어 뚝 떨어지진 않습니다. 너무 쉬운 해석을 거부하고 싶으니 좀 더 돌아가볼게요.

상처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박봉팔은 제법 안쓰러운 인간인데, 당연하게도 그건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슬슬 자기가 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뭣때문에 괜한 일들에 힘들이느니 조금 나쁜 놈을 자처하기로 했는지,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도 가물해질 시기입니다. 감정을 모두 기억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모든 건 닳고 왜곡되기 마련이죠. 박봉팔은 그 상처 이후로도 14년을 더 살았고, 그간 어른으로서의 좌절과 고통은 겪었을지 몰라도 반드시 맨처음의 상처만큼 힘들지는 않았을 거라고 추측해봅니다. 설령 힘들었더라도 어린 시절처럼 솔직하게 슬퍼하지 않죠. 대신 봉팔이는 날 서고, 어른스런 방식으로 자기 잘못이나 회피하고 싶은 상황을 처리합니다.

‘내가 잘못했다지만, 이런 식이면 미안한 마음도 사라진다’ 거나… ‘꿈이라기에도 그 정도로 열심히 안했는데, 때려칠까 싶다’ 거나… 하루종일 홀로 게임이나 하고 자길 만나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과 술마시러 나가고… 하민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마음을 갖는지도 모르면서 연애를 작정하고…

적다보니까 이 자식 이거 웃기는 놈이네… 왜그랬니.

진정하고 더 써보겠습니다.

이게 어른스러움인가? 어쩌다 어른스럽게 일을 이따구로 대응하게 되었나… 를 생각해봅시다.

작품 내부에서 인싸-아싸의 구도가 많이 등장하지 않나요. 그 최전선에 박봉팔이 스윽 얼굴을 내밀었었죠. 초반부에. 작내의 인싸 사회는 (현실이 진짜 그런가? 하면 저는 모르겠지만. 케바케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인간이 컨텐츠로서 소비되는, 스스로 소비되길 추구하는 인간들의 장으로 표방됩니다. 물론 안전한 (랑데뷰의 소꿉친구 네명처럼) 방식의 소규모 사회도 있지만, 그들도 다른 곳에 발을 걸치고 있죠. 크게 봉팔이와 소연이는 공설 미인들로서… 하여간에 모두에게 소비당하고, 그러한 소비로부터 흘러나오는 부가가치를 누렸다가도(소연이…정말 누렸는지는 복잡한 심정이지만 여기선 생략합니다.) 거기에 해를 입기도 반복하는 인물들입니다.

소연이가 자신을 받아주고, 도윤이와 살 수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는 사회에 뛰어들어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잊어버렸듯이, 그런 식의 인싸 사회의 무신경한 차가움과 화려함, 일종의 광란은 해악적인 부분에서 (몇배는 약하지만) 봉팔에게도 작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세상에 하민이 같은 사람이 아직 실존하고, 그런 소심하고 느린 방식의 인간관계도 갖고 싶을 때가 있으며,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도 눈앞에 있는 단 하나의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격차를 잊고 살았다는 겁니다.

자신들의 세상에서 배운 언어와 행동으로 대응하면 하민이는 이해하지 못한 채로 상처받길 반복하고, 하민은 익히 봉팔이 아는 방식으로 ‘쿨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행동과 신호가 어긋나죠. 왜 저러는지 알 수 없다. (이게 처음엔 귀여웠겠지요… 지금도 귀엽긴 하겠지만 만남 초기엔 좀 다릅니다. 자신이 좀 더 관계에 능숙하고 우위에 있는 것 같다! 는 생각이 온사방으로 티나잖아요.) 늘 그렇게 생각했을거예요. 그리고 좀 거절당하자마자 위에서 행동해온 것처럼 얼른 포기하고 도망치죠. 이 행동의 의미는 “귀찮은 건 죽어도 안한다.” 이렇게도 보이고, “난 절대로 이런 가벼운 감정들로 상처받지 않겠다.”, “난 원래(엥, 원래라는게 어딨다고?) 이런 사람이다.”, “원래(엥?2) 다 이런거다” 같기도 합니다. 그래요. 하민이와 봉팔이는 둘다 쌍으로 회피형 인간이랍니다.

사회에서 봉팔이는 한편 잘나가지만 한편 허울로 살아갑니다. 평생 그랬듯이 남들이 제멋대로 기대한 것을 등에 업고 이것이 언제 사라지는지 스스로도 의구심을 가지며 여기까지 왔죠. 모든 세대가 그렇겠지만 특히나 20대 답게 불안해합니다. 자기가 뭘하는지, 이것으로 뭘 얻고자 하는지, 이게 나에게 즐거운지 확인하는 과정이 안끝났다는 소리예요.

겉보기에는 모든 걸 가졌고, 가졌다고 어느 정도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친구들을 보면 아닌 것만 같을 때도 있을 겁니다. 당연스런 불안이 필연적으로 박봉팔 안에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진심이고 싶지 않으니(또 다 박살나거나 상처받으면 어떻게 하느냔 말이죠? 구미가 당기는 사람도 없고요.) 제자리에서 잘생기기만 한 것이죠. 그렇게 있어도 당연히 불안은 소비되지 않고, 손뻗으면 가능한 연애라는 수단이 있습니다. 이 때 연애는 적당한 놀이고, 플러팅은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이 행위를 얼마나 잘 아는지 확인하는 게임인거죠. 사람을 알아가며 옆구리 시린것과 내면의 상실감, 온갖 불안을 떼우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하민이는 거기에 낚였습니다.

재밌는건… 그러고 살아왔으니 랑데뷰 소꿉친구들도 다들 박봉팔이 가볍다고 경고하고, 걱정하는데 박봉팔이 예상외로 독자가 걱정한 방식의 쓰레기는 또 아니었다는 겁니다. 소위 하남자인 것 같기는 한데요. 저는 이런… 박봉팔이란 인간의 막나가지 않는 선이, 현실성을 조금 덜어낼 지언정 주제부를 탄탄히 만들고, 봉팔이라는 인물의 다면성을 더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사정이 있지만 앞서 저지른 일을 모두 이해할 정도는 아닙니다.” 바로 이 선을 지키는 것 말이에요. 흔히 후회공이라고 하죠? 빌면서 바로 닦개가 되고, 여주인공의 상처를 풀어주고… 이런거요. 랑데뷰에 그런 건 없는 것 같네요… (아직까진) 전 그게 참… 좋았습니다.

전 사실 조금 다른 의미에서 1부 마지막 언저리에서 사랑에 빠진 박봉팔을 의심해왔습니다. 사랑은 맞는데, 이게…그러니까, 연정일까요? 사랑에 있어서 봉팔이에게 무엇보다 귀중한 것은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죠. 꾸준히 그렇습니다. 처음에 지은이를 좋아한 것 부터가요. 이후엔 여태 겪어왔던 인간관계의 험난함 덕인지, 스스로의 관대함 덕인지 자신을 사려깊게 용서해준 하민이에게 이전의 호감을 넘어서서 제 딴엔 ‘진짜로’ 사랑을 하려고 하니까요. 사람들이 소위 로맨틱 감정이라 칭하는 것들은 결국 언제나 내가 바라왔던 방식의 친절을 찾아헤매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날 정말 이해해줄 것같은, 혹은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갈구하는 로맨스는 정말이지 많습니다. 이게 정말 사랑일까요. 아니면 봉팔이가 지금 하는게 사랑은 맞는데 ‘그런’ 로맨틱한 사랑이 아니거나… 전 그냥 둘다 겹쳐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욕망조차도 다면적이니까요. 사람은 피자가 먹고 싶은데 동시에 자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봉팔이는…자기 마음을 모르는 채로 욕망하는 인간의 전형입니다.

결론적으로, 박봉팔은 가벼워서 영원히 후회할 짓을 한다지만 그건 여태 살아온 세월이 만든 것입니다. 단 한순간의 경험에 좌우된 것은 아니며, 달라질 기회는 여럿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환경에 따라 주어지지 않았거나요. 어쨌건 말그대로 습관성 방어기제인 셈이죠. 그게 지금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살아남기에도 아주 좋았을 것 같습니다. 집까지 쫓아오는 사람이 소연이 한 명은 아니었다는 뉘앙스의 대사가 몇번 있었잖아요? 진중함으로는 이겨내지 못할 방식의 무서운 접근이지만, 그렇게 가볍게 굴면 타격은 덜받고 끝낼 수 있을테니까요. 물론 정말 진중한 사람이었으면 마구 번호를 날리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별 생각 없이 사람을 사귀고, 그래놓고 언제나 도망칠 준비를 하고, 상대도 자기만큼 가볍기를 기대하면서, 여전히 사람 속에 머무는. 끝내는 하민이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지은이가 첫사랑인. 가족들이 돌아오길 바랐고, 그게 모두 지난일이라고 생각할 사람. 저는 이 이중적인 면들이야말로 정말 봉팔이를 요약한다고 생각해요.

상처받은 사람은 결코 영원히 상처받은 채로 살지 않습니다. 상처를 덮기위해 노력했다가도, 그러는 동안에도 삶은 진행되기 때문에 주변을 바라보며 다른 욕망에 휘둘리고 허덕이죠. 유명세, 명예욕, 출세욕, 평화로운 삶을 향한 열망, 안정적 관계, 부를 향한 욕망… 등등이요. 그런 욕망들이 “내가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되나?” 하는 소극적 태도를 매개로 이전의 상처위에 들러붙어 완성된 것이 봉팔이라는 사람입니다.

알 수 없는 세월 위에 확립된, 스스로도 자신이 뭔줄 모르는 사람이요.


너무 열심히 썼다...

랑데뷰가 정말 재밌었나봐요. 조만간 이러다 또 재주행할 것 같은데, 그때는 또 봐놓고 박봉팔 그냥 개자식이네… 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막 정주행을 마쳤더니 시야 수준이 좁고 그냥 단발적 감상같기도 하거든요. 중간중간 이랬었지? 하고 기억으로 채워둔 부분은 틀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제 심상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사실 좋아하고, 감명깊은 부분은 다 따로 있는데 사람이 꼭 이런 … 자기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못 참잖아요. 이미 작품에서 완성된 것만 같은 부분은 못 말하고 꼭 아직 ing중인 부분에만 감상을 적어대는 것이, 저도 아직도 십덕후 동인러 기질을 못버렸습니다. (안버릴거예요.)

뭐라고 마무리를 짓는담…

제가 박봉팔에게 공감 맥스를 찍었다고 입을 털었으니 웃긴 얘기 하나만 더 하고 가겠습니다. 저… 최애가 이지은입니다.

공감엔 이유가 있었던 게지요… 웃으셨나요? 마지막으로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제가 비록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봉팔이보다 착하고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걸 명심해주세요. 그럼 이만. 아디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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