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중독자의 일지 (feat. 씩 오브 잇, 헌트, 내스급, 전생연분…)

분기별로 뭘 봤는지 저장해두지 않으면 지가 뭘 봤는지도 잊어버리고, 뭔 책이 집에 있는 줄도 모르고, 다만 좋아하는 작품만 기억하는 삶… 기억의 생존을 위해 ㅋ 기록합니다. 긴 리뷰를 적기엔 너무 많은 걸 ing로 보고 있어요.

조금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항목별로 보세요.

1.

씩 오브 잇

영국식 기기묘묘한 사르캐즘을 한사발 집어넣은 정치풍자 드라마입니다. 시즌3 3화 보다가 ‘너무 현실적 개쓰레기들이라 스트레스 받는군’ 하고 접었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그 맛에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다가 씩 오브 잇을 보면 ‘미쳤다고 나오는 쟤네가 오히려 정치 잘하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내가 웃을 때가 아니라면?’ 하고 말아요. 웃다가 생각해보니 웃을 때가 아님.) 그걸 또 요즘 다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인생의 쓴 맛을 느낄 때는 이게 또 괜찮다고 해야 되나… 이 염병을 떨면서요.

제가 이런 작품에서 누굴 제일 좋아할 것 같으십니까?

테리요? (그녀는 슬프게도 아무 것에도 관여하지 않는 얌체 직장인을 노리지만 필연적으로 일을 많이 합니다)

물론 저는 테리도 좋아하지만 당연히 말콤을 좋아합니다… 말콤이 뭐하는 놈이냐고요?

말콤은… 쌍욕으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동시에 자기가 어디에서 뭘하고 있는지 너무 잘 알지만 그만큼 ‘제정신으로 이러고 있다고?’ 싶어지는 사악한 똥덩어리같은 중년이에요. 본인이 세상을 제삼자적 시점에서 관망하고 있으며, 말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믿는 시네필들이 많이 좋아할 것 같은 타입입니다.

전 아닙니다. 설득력 없겠지만 전 아닙니다. (어쩌면 일부 맞을지도 모르지만,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믿어요. 저는 문제가 있지만, 다른 방향의 변태새끼입니다.)

하여튼 아닙니다. 전 시즌3 모 에피소드 소제목이 말콤의 몰락이라 활짝 웃으면서 계속 보고 있어요. 슬프게도 전 열심히 잘 살지만 악랄한 중년의 타락을 항상 재밌게 보거든요. 삼국지를 끊임없이 읽은 이유도 아저씨들이 열심히 살다가 자기들끼리 파멸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 후삼국을 보면서 쭈룩 웁니다.)

적다보니 역시 저도 좀 문제가 있는 듯함…

+20221219 추가 : 말콤이 나만 보면 짖는 옆집 치와와나 자주 취해서 역정내지만 실제 해는 못끼치는 아저씨 이미지로 시청자에게 소비되기도 하는 듯해 덧붙여둡니다. 그래요, 저도 나중에 망할 것 같은 외로운 악당을 좋아하지만 … 영국에선 그만 좀 나왔으면 싶기도 하고…

2.

헌트

배우가 감독을 하고 본인을 주인공으로 넣으면 이런 컷도 냅다 넣어버릴 수 있구나… 싶은 씬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계단에서 두사람이 우당탕 쿵탕 구르면서 싸우는 걸 직접 한다거나, 팔한쪽 묶인 채로 냅다 좌라라라락 들려 올라간다거나.

흑사회가 왜이렇게 보고 싶어졌는지 모르겠어요. 결말도, 연출도, 이야기도 한국적 느와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선을 아주 잘 지킨 작품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나오니 급진적이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그냥 평범하게 적당히 … 나이브하고 적당히 보수적인 작품이었다고 생각해요. 딱 제가 홍콩 느와르에 기대했던 방식의 폭력과 비련이 있었습니다.

이런걸 좋아한 사람들이 만든 거겠죠?

업보 청산과 희망 줫다 뺏기가 느와르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인물들이 자신의 소망을 외치면서 죽어가는 것, 그것이 이 모든 폭력에 대한 변명이고, 가장 완벽한 클라이맥스입니다.

3.

내스급

아니 이걸 왜 지금 보는데. 하는 분들께 말씀드리자면 마이너 인생을 사는 사람은 원래 다 그런겁니다. 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겠습니까?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여튼 잘 보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부모의 부모가 되고 싶어한다는 말 아시나요? 아마 제가 성정치학 읽을 때 메모해 둔 말일텐데, 재인용이라 원 출처를 모르겠네요… 슬프지만 뉘앙스만 알아주십시오. 내스급의 어지간한 인물은 한유진의 부모가 되고 싶어하거나, 한유진의 아이가 되고 싶어하거나 하거든요. 한유현과의 관계가 딱 그러려니 싶어서 말해봤습니다.

제게 내스급의 재미요소는 그보다는 던전&게이트 설정과 한국 정치와의 결합에 관한 부분인데요, 그외에도 설정들이 오밀조밀해서 보는 맛이 있네요.

육아파트는… 잘 모르겠습니다. 부모가 필요했던 아이는 다른 사람의 부모가 되어주고 싶어하는구나… 이러고 있어요. 이제 막 7권 넘어가고 있으니 한유진이 언제쯤 본인의 외로움을 솔직하게 드러낼지 지켜보겠습니다.

4.

전생연분

어쩌다 보게 되었는지 잘 기억이 안납니다. 저는 거의 뼈에 새겨진 본능에 가까운 방식으로 여자 둘이 붙어 있다고하면 백합도 아닌 작품까지 용감하게 열어보는 버릇이 있는데요, 아마 그래서 보았겠거니 했어요.

저 자신의 더러운 이중성을 뚜렷하게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남성진과 여성진이 붙어있을 때는 덤덤하게 있다가 숙빈과 중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제가 얼마나 따스하고 관대하며 애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읽었는지요. 작가님의 실력은 계속 좋았는데 저는 그제야 ‘이 작품은 킹갓이구나’ 이러고 있었으니 뇌에 누가 뭘 잘못 심어둔 것 같기도 합니다.

작품은 적당히 재밌고, 특히 옛날 궁 보시던 분들이면 잘 적응하실 것 같은 특유의 테이스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작가님 작화가 무너지지를 않고 일정하게 아름다워요. 그것만 해도 순정만화에선 무척 좋은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심심하시면 보시고… 저랑 같이 대비님 얼굴 봐주세요. 진짜 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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