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중독자의 일지 (feat. 와일드 로봇, 더 베어,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더 라스트 도어)

와, 정말 말도 안되게 긴 세월이 지났습니다. 다들 아직 살아계신가요? 저는 아직도 오만 것들을 뒤적거리며 살고 있어요. 쏟아져나오는 무수한 작품들 속에서 ‘오늘 보고 싶은 것’을 고르는 작업만으로도, 그야말로 장난아니게 긴 시간이 드는 시대입니다.

다행인 점이라면 저는 이제 원하는 걸 찾는 데 긴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겠죠.

왜냐고요? 그야 이젠 일단 틀어놓고 생각하거든요. 이 미디어 홍수의 시대, 미디어를 좋아하는 사람의 덕목은 작품을 고르는 눈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단 눈에 띄는 걸 보는 수용능력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더 많은 작품속에서 빨리 그나마 괜찮은 걸 찾아낼 수 있거든요. 좀 자아를 없애고 파도에 몸을 맡기라는 구세대 ‘먹고 사랑하라’ 감성같은 말이지만, 하여튼 그렇습니다.

제가 이 파도속에서 게으르게 발길질을 하는 동안에도 괜찮은 작품은 끊임없이 태어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말이죠…

  1. 와일드 로봇

와!!! 로봇이다!!!

하고 골랐습니다. 개봉 당시 드림웍스의 영혼이 느껴진다, 생태와 기술의 대비를 보여준다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던 작품이지만. 제겐 일단 이족보행을 하더라도 인간 얼굴이 안달린 로봇을 향한 로망이 있거든요.

다들 월-E를 좋아했던 경험 정도는 있으시잖아요? 저도 그래요. 없다고요? 왜 없는데?

하여튼 그런 이유로 늘 함께 영화를 봐주시는 지인분과 감상했어요. 근래 시국덕에 차가운 심장을 안고 살아가던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거든요. 실제로는 위로라기보단, 제 머릿속에 자리잡은 생태주의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위로를 못받은 건 아닌데 전 아동영화의 갈등에 유난히 가슴이 뛰고 몰입해서 어떡해! 하다 눈물이 후더덕 나는 여리고 따스한 사람이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간 무수한 창작물 속에서 인간과 소통해야만 했던 우리의 자식이 (그러나 자식은 독립해야하죠) 인간됨을 선택하는 대신에 우리가 버린 자연을 선택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이런 영화가 종종 나오는 것 같아요. 핀처도 그렇고… 둘다 재밌으니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겁나 중요한 사실: 아니 세상에 엄청나게 섹시한 촉수 로봇이 나와서 백합을 (중략, 궁금한 사람은 주시자에게 연락)

2. 더 베어

시즌2 보는 중이에요.

이게 아마, 주문창을 안 닫아놔서 8분 만에 200~300인분을 만들어야하는 상황에서 인물들이 다같이 화기애애한 쌍욕을 주고받는 클립으로 먼저 접했었는데요. 저는 조리 알바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잘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저거 절대 안봐야지’ 했던 드라마입니다. 아니 내가 미쳤다고 3D 주방 피크타임 체험을

물론 저는 미쳤기 때문에, 드라마를 틀었습니다.

정말 괜찮은 드라마였어요. 개인적으로 저는 인물들의 대화속에 정말 김새는 위트가 있는 걸 좋아하는데요. 이 드라마엔 그런 김빠지고 정드는 위트가 가득 차 있었거든요. 물론 쌍욕도 많이 차있습니다. F-word라는 걸 이렇게 자주 들은 건 오랜만이었어요. 요즘 아동영화를 좀 봐가지고. 그래도 전 원래 공포영화와 액션, 스릴러의 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뭣보다 드라마의 시점이 제가 쌍욕을 듣는 포지션이 아니라, 쌍욕을 해야하거나 강건너 불구경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괜찮았어요.

PTSD와 인생의 여러 실패를 거쳐 이 작고 낡은 주방에 도달한 인물들이 나오는 드라마입니다. 그들이 꼭 실패해서 여기 있는 건 아니지만 몇몇은 자신이 실패해서 여기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신의 실패를 들여다보면서도 진솔하게 살아가는 인물은 사랑하지 않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억지를 부리기도 하고, 만용으로 또 작은 실패를 반복하기도 하지만 모든 건 결국 단 하나의 인간이 벌이는 행위거든요. 아무리 끔찍한 일이 벌어져도, 영화속이라면 클로즈업으로 찍힐 만한 감정적 격정을 겪은 뒤라도, 내일은 옵니다. 잠도 자게 되고요.

이들은 그런 순간들을 여러번 겪어본 어른들이에요. 뭔일이 벌어져도 살아서 오늘을 맞이 하고 비장한 마음없이도 필사적으로 살아갑니다. 그게 좀 웃길 때도 있는데 그래도 슬픈 것보다 나으려니 하고 사는 것 같아보여요.

연출적으로도 박자감이 있어요. 단순한 내용도 지루하지 않게 잘 끊고 이어붙입니다. 요리물 맛도 제법 나고요. 앗 생각하니 배고프다… 재밌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동안 이어보지 싶습니다. 다들 봐줘.

3.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작~은 쥐와 왕~큰 곰의 이야기입니다.

와일드 로봇에 이어서 봤어요. 뭔 생각으로 봤는지 알겠는 라인업이죠? 따뜻했습니다. 물론 이게 생각보다 ‘아니 시대가 빈자를 굶겨놓고 이제는 교수대에 매달려고 하는가’ 싶은 레미제라블스런 내용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아동을 위한 동화구나 싶었습니다. 애들도 봐야지.

기억나는 건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이 언덕위의 낡디 낡은 집에서 보내던 나날의 영화로움인데요. 눈이 내리고 꽃이 피어나고 강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연한 색채가 가득 채운 화면속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와 작은 쥐와 곰의 모습이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그 시퀀스만 여러번 보고싶을 정도로요.

그 부분을 위해서 보시는 것도 추천해요. 물론 다른 부분도 전반적으로 동화가 엄청 아름답습니다. 대충 그린 것같은 뾰족 주댕이 쥐들도 엄청 귀여웠어요.

4. 더 라스트 도어

이건 게임인데요. 스팀에 2편까지 있습니다. 2가 완결이에요.

제가 이걸 플레이하기 시작한게 아마 작년일텐데 이걸 거의 1년 걸려서 깼습니다. (ㅋㅋ) 저는 게임을 잘 안하다보니까, 요즘엔 나름 엄청 많이 한다고 한 건데 이게 이만큼 걸리네요.

정말 괜찮은 호러게임입니다. 사실 근래 한 게임중에선 제일 재밌었어요. 도트 그래픽에 주인공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는데, 와중에 모든 연출을 횡스크롤 도트게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했어요. 화면이 전환될때마다 플레이어의 시선 이동을 고려해서 배치하는 방식이 마치 영화같고, 사운드 활용도 지금 플레이어가 어디까지 왔을지 정확히 예측해서 주어서 무척 좋았어요. 제작자가 감각이 좋구나…! 하는게 아주 잘 느껴진.

스토리상으론 크툴루 신화에 기반한 설정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분위기나 이야기 흐름은 좀 더 에드거 앨런 포우에 가까운 느낌이에요. 저는 포우를 정말 엄청나게 좋아하며 청소년기를 보낸 비극적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무척 취향에 맞았습니다. 포우 작품 중에서도 그 뭐야, 심리학자들이 나오는 단편이나 어셔가의 몰락, 아몬틸라도의 술통을 좋아한 분들이라면 좋아할 파트들이 제법 나옵니다. 셜록 홈즈도 아주 약간.

아니 이거 내용을 안 적고 있네… 하지만 모르고 플레이하는게 좋을지도 몰라요! 제대로 적고 싶으면 이건 제가 나중에 더 긴 문서로 적는 것으로.


짠, 오랜만에 일지를 쓰니까 할말이 너무 길어지네요!

나중에 또 짜잘한 말들을 기록하고 싶어지면 올게요.

벌써 명절이 다가오는데, 이렇게 되면 미디어 중독이 되기에 딱 좋은 시기 잖아요?

다들 새해복 많이 받으시는 김에, 본인의 인생을 바꿀만한 좋은 예술 작품을 접하시길 바란다는 저주를 남겨두고 갑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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