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주시자입니다. 대체 얼마만이죠?! 정리하지 못한 채로 흐른 세월이 산처럼 쌓인 오늘입니다. 분명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보고, 많은 것들을 기억하게 되었겠지만 실상 기억나는 것은 많지 않은 오늘이기도 하고요.
요약하자면 세월이 정말 눈 깜짝하는 새에 지나버렸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물어보아도 거울이 대답해줄 것도 아니니 변명이 길지 않군요. 시간은 원래 말이 많지 않습니다. 자, 그럼 더 이상 긴 말을 하는 대신에!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추억이 될 수 있게끔 기나긴 노가리를 까러 가보겠습니다.
요즘 진짜 긴 제목의 작품을 많이 봤더라고요. 여기 적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 라든가.
늘 그렇듯 모든 글에는 조금씩 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니, 부디 보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다면 Ctrl+F를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1. 죄인 시즌1
수사드라마입니다. ‘수사’드라마라고는 하지만 사실 수사’드라마’의 성격이 조금 더 강한 신기한 드라마예요. 모든 수사물이 어느정도 인간드라마의 기질을 띌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기는 한데, 이 드라마는 정말로 인간드라마에 더 치중해버렸다고 해야될까요?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만약 ‘A라는 사람이 지하철역에서 남편을 죽인 뒤 뒤돌아서 지하철을 타고 사라졌다.’ 라고 할 때, 보통 이런 현장범은 바로 체포되고 그대로 이 사건은 거의 종결되는 분위기로 진행되잖아요? 정확히는 다른 증거가 나와서 더 큰 범죄로 흐름이 이어진다거나, 알고보니 거대한 흑막이 있다거나 한 식이죠. 그런데 이 드라마는 정형화된 룰 대신 다른 공식을 택해요. A가 왜 그랬는지 찾는 것입니다. 오로지 A와 형사, 그 둘의 미지근하고도 고요한 분석을 반복해서요.
물론 이 드라마에서도 다양한 수사기법이나 추리물스러운 측면들, 알고보니 수상쩍은 뒷사정과 또다른 범인 등등의 스토리가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보통 다른 작품에서 기대되는 수준은 결코 아니에요. 여기에는 다른 작품에서 바랄 수 있는 재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A와 세상, A와 형사, 형사와 세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진행돼요. 흔히 쓰이는 관용구처럼 한 사람의 인생이 책 한권에 필적한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 책 한권에 빈 부분은 얼마나 많고, 이해불능에 가까운 미스터리는 얼마나 많은지.
여태 A가 해결하지 않고 살아온 인생의 짐 속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는가.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하고 또 기만적일 수 있는가 하는 지점을 차분히 짚어나가는 과정이 정말 새롭습니다. 이 이야기는 ‘범죄자에게 기회를 주자’ 거나, ‘알고보니 선한 범죄자가 있었다’ 따위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진행하더라도 큰 상관은 없었겠지만, 그러지 않아서 독특한 이야기이기도 했어요.) 그저 정밀하고 엄격하려고 애쓰죠. 엄밀한 이야기, 엄밀한 수사라는 것은 어디에 도달할 수 있는지, 혹은 엄밀한 수사라는 것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한 사람의 인생에 ‘단순한 이야기’라는 것이 존재할 수는 있는지 되묻는 섬세함이 정말 좋습니다. 형사를 선인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단순한 범인과 단순한 선악을 그려내선 안되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이야기는 충분히 복잡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할테니까요. 법적 처벌의 기초는 언제나 그런 성가신 가정 위에 세워져야하는게 아닐까요?
하여튼 정말 재밌게 봤어요. 지금 시즌2를 보고 있는 중이랍니다.
+별개의 이야기: 주인공이 BDSM을 하고 멜섭 포지션이었는데 말이죠. 제가 초반에 ‘드라마가 그의 처연함과 초연함을 너무 강조해서 곤란하다’ 고 엄청 놀렸다가… 그게 미안해질 정도로 피학과 가학의 원리와 추동하는 감정들을 탐구적으로 표현한 연출들에 정말 곤란했습니다. 앞으로는 함부로 웃지 말기로 했어요. 전형적 편견 아니냐고 놀린 건데 사실 그냥 전형적인 건 나 자신이 아닌가 싶어지는.
2. 리버스 : 1999
이쪽은 십덕후 얘기입니다. 딱히 제대로 된 평을 할지는 모르겠고요, 하기엔 좀 감정이 많이 들어가서…
립구 말이죠. 제가 사실 6장을 하기 전까지는 ‘게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로부터 성별 구분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백합을 먹는다는 말이 안나온다.’ 라고 했었는데, 6장 이후로 제 그 말에 어떤 마가 낀 것처럼 모든 조합이 도무지 백합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너무 곤란합니다. 그야…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이졸데라는 인물의 면면들이 그 시절 여성에게 부여되어온 모든 이미지의 모독적인 전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독적이라는 건 매력적이라는 뜻과 거의 동일한 뜻이니 이 시대의 과장된 관용표현으로 알아들어주시고요.
여성학적인 관점의 이야기를 할 마음은 아닙니다. 제가 여성주의적으로 이졸데를 보기엔 저는 저런 이미지에 너무 많이 ‘호’를 느껴서 불손한 감정을 더 많이 느끼거든요. 하여튼 이졸데는 분열되어 있고, 히스테릭하고, 집착적이고, 아주 아름답고, 페미닌하고, 억압되었고, 분노하고, 거기에 의문을 안갖는데다가 그러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한 인물입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런 여성의 이미지를 배척하는 척하면서 아주 즐겨왔다고 생각해요. 다른 면이 있다면, 이졸데가 이 가챠겜의 시대에 이르러선 전면에 등장해서 사람을 죽이고도 퇴장을 안한(천벌받지 않는)다는 점이죠. 저는 그 지점이 모독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때 안 좋아하던 척 몰래 좋아해온 모두에게요. 이러라고 생겨난 이미지가 아닐텐데 이 시대엔 이토록 대놓고 매력적으로 소비된다는 점이 참 재미있지 않나요.
이졸데 얘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리버스:1999가 지향하는 캐릭터 빌딩에서 느껴지는 것이 대체로 이런 식이에요. 과거의 이미지들을 들고 와서 놀잇감으로 삼고, 조금씩 비틀어서 근현대, 고대, 중세 작품을 읽을때 느꼈던 현대인이 감당 불가했던 면모들을 깎아 가져다 주는 것이지요. 자극적이고 매력적이었던 부분들은 남아있기도 하고 동시에 함께 깎여나가기도 합니다. 저는 그들이 찾아나가려 노력하는 적정선이 가끔씩 다소 심심하고 의문스러운 맛을 준다고 생각하는데요. 다행인 점이 있다면 제가 이미 레퍼런스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연출이 좋고 기초적인 이야기의 골자는 좋으니, 만약 설명이 부족하더라도 알아서 알아먹는 거예요. 1, 2장은 체감상 저 스스로 채워야하는 부분이 많았다면 뒤로 갈 수록 저 스스로 채워야할 부분이 줄어들어서 이젠 이 소리도 조금 틀리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초반부에 느꼈던 그 묘하게 빈 느낌이, 리버스:1999의 매력인지 아니면 이 시대의 가챠게임 생존전략이자 매력이기도 한 부분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고 계신 분은 제게로. 하여튼 재밌게 하고 있어요.
이제 8장에 들어섰군요.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됩니다! 재미있으면 좋겠어요.
3. 데블스 플랜 1, 2
두괄식으로 말씀드릴게요. : 내가 이걸 어쩌자고 다 봤지.
재미가… 없던 건 아닙니다. 없지 않았어요. 1은? 무척? 재밌게 봤습니다. 저는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해서, 플레이어들이 어떤 형태로든(졸렬하든 이해되지 않든) 힘내서 으쌰으쌰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습니다. 게임상 허점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많지 않았고요. 솔직히 큰 생각을 하고 본 건 아니라서 일단 절 편안하게 만들어줬고 아무 생각 안했더니 끝까지 본 것 만으로도 만듦새가 나쁘진? 않은? 게 아닌가 싶고요. 물음표가 왜이렇게 많냐면 시즌 2 보고 시즌 1의 재미와 감동 이런게 좀 기억이 안나게 되어서… 여러분은 정 보시려면 2보고 1보세요. 물론 2를 보면 1을 보기 싫어질 수는 있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힐링이 될 겁니다. 저처럼 2를 마지막으로 보면 진짜 돌이킬 수도 없고 되돌릴 길도 없어서, 위로할 것을 찾아 헤매다가 더 이상한 걸 보게 되거든요. 어느 정도냐면 제가 0.5점 준 영화를 이독치독하려고 볼까 고민했었어요.
시즌2…
여기서부터는 이제 좀 기억이 안납니다. 저는 원래 고통스러운 기억은 잊어서요. 이 예능이 10화 이후로 평점이 곤두박질 치는 작품이라는 걸 여러분은 알고 계셨습니까? 실제로 저도 9화까지 아무 생각이란 걸 안하고 ‘아아 그렇구나’ ‘권력이라는 건 강대하구나’ ‘이 작품은 그러니까 부익부빈익빈이 테마구나’ ‘현대사회의 모사품이구나, 그게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고 보고 있었는데요. 10화부터 이상하게 뒷내용을 보기가 어렵고 진전이 안되고 아~ 어쩌라는거지 싶고 일시정지 누르고 다른 짓하다가 며칠만에 이어서 보고 했습니다. 그런 느낌이에요. 뭐가 문제?냐면 재미가 문제가 아니라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니까 어떤 느낌이냐면 예를 들어서 대학 교수가 갑자기 강단에서 뛰쳐나가면서 과 학생 전원에게 F를 줬는데,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한 상황에서 대학이 그 성적을 진짜로 정정 하나 없이 수용해버리는 내용같습니다. 뭐라고? 설명은 해줬는데 아무리 그래도 교수님이 그러면 안될 것 같기도 하고…이해가 안가고 왜그랬는지 모르겠고 진짜 이러면 안될 것 같고, 실제로도 그러면 안되고 그렇죠? 그런 느낌입니다. 계속 생각이 났어요, 엔딩 나고도… 누가 싫다 그러면 안됐다 이런 차원이 아니라, 아니 진짜… 왜지? 왤까요? 왜 그렇게 됐을까요? 왜… 이런 방송을 해버린 걸까요? 이래도… 되는 걸까요? (안되지 않나 싶어요.) 또 쓰다보니까 생각나네… 아 안되겠다 그만 쓰겠습니다. 하지만 혹시나 보시겠다면…재밌는 선택을 하셨네요. 인생의 고민을 잠깐 잊고 싶을 때 보세요. 진짜 왜그랬는지 궁금해하게 됩니다. 너무 궁금해서 왜 그랬는지 한 두시간 찾아보고 결론도 내렸는데, 그래도 진짜 이해가 안가서 한 이틀 더 생각했었어요. 저도 참 할일이 없었군요, 하여튼 그랬습니다. 보시면 저한테 연락주세요… 나누면 두배가 되는 고통.
4. 긴키지방의 어느 장소에 관하여
이것도 사실 빠른 요약이 가능합니다. 전 진짜 재밌게 봤어요. 그런데 3번 보면 죽는 영상 3번 보면서 큰 애들이 아니면 진짜 싫어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원작을 보는 대신 영화를 보고 원작을 보는 흐름이 현명하게 재밌을 듯해요. 제가 그렇게 봤는데 원작이 참 잘 짜인 찌라시형 소설(가상의 찌라시를 전부 다 모아 현실처럼 재현한 소설입니다.)이라서 영화의 결말이든 무엇이든 좀 짜치게 느껴질 가능성이 크거든요. 물론 모르고 봐도 위에서 말한 3·3 키즈가 아니면 진짜 싫어하실 수 있어요. 그분께는 시시하고 심심한데 괜히 잔인하고 더럽고 그런데 어이없기까지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진짜 무진장 재밌게 봤습니다.
3번 보면 죽는 영상이라는 것 부터가 정말 말초적 자극의 뭉텅이같은 거잖습니까. 말초적인데 심지어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하고요. 자신이 상상한 불온하고 조금 지저분한 공포를 스스로 나서서 사랑하기까지 해야하는 작업입니다. 그건 딱히 누가 강요해서도 아니고, 환경이 만들어주는 경우도 드물고 그냥 타고나는 영역인 것 같더라고요. 저는 저같은 사람이 많을 줄 알고 사회에 나왔는데 이렇게나 그런 사람이 적은 현실에 매순간 충격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들인가 싶기는 한데… 저도 제가 이 정도로 좋아할 줄 몰랐고, 보고 나오면서도 이야 이거 진짜 재밌다! 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이럴 때마다 인간의 ‘취향’ 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품 평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평생 말초적 자극을 제시하는 공포영화에 제대로 된 평따위 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행복하긴 할 것 같으니 이대로 살려고 해요. 무엇이든, 일단 누르면 꺄르륵대는 버튼이 하나 있는 건 인간 삶에 제법 좋은 일이니까요.
5. 룩 백
지인이 빌려주셔서 그 자리에서 읽었어요. 그래서 컷 하나하나를 파면서 열심히 보진 못했지만, 다만 만족스러움은 분명히 기억합니다. 작품 자체가 좋을수록 읽은 사람이 할 말이 적어지듯이 룩 백도 사람으로 하여금 할 말이 적어지게 하는 작품이었어요. 옆에서 다른 분께서 “후지모토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라고 해주셨는데 정말 그 말대로 였습니다.
제 감상도 결국 비슷합니다. 저는 배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분함을 느꼈다고 해야되나. 후지모토 타츠키씨의 다른 작품들을 분명 꽤 좋아하면서 읽었는데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사람은 왜 이런 걸 요만큼 그리고 체인소맨을 20권째 연재중인 거죠? 몰라서 묻는게 아니라요. 룩 백이 너무 좋았어서 자꾸 생각이 납니다. 그 자리에서도 했던 말이지만 저는 그가 룩백 20권에 체인소맨 20권을 연재했으면 절대 뭐라고 안했어요. 오히려 좋죠. 저는 체인소맨도 잘 봤으니 (사실 1부가 대만족해서 2부는 안 읽었습니다만) 개이득인 상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진짜 왜? 룩 백은 단권이고? 이 인간 진짜? 싶네요.
그는 영화도 좋아하고, 영화적 연출을 만화에 가두는 데에도 능하고 그림도 정말정말 잘 그립니다. 저는 이 사람이 체인소맨을 그리는 데에는 어떤 유감도 없어요. 저도 재미있게 봤다니까요? 레제편 개봉하자마자 보러갈 생각이라니까요?
…그런데 왜 룩 백은 한 권만 그린 것인지… 물론 한 권이라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단권으로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 자신이 있는 거라면 이런 걸 단권으로 20권 찍어내라고 작가에게 협박하고 싶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극장판도 보려고요.
자세한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는 쓰고 싶어지면 따로 빼서 길게 적어야하는 만화같아요. 그래서 여기엔 후지모토 타츠키는 분발하거나 분신을 만들라는 말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
몇년 사이에 이런 글을 쓰면 뚱뚱하게 쓰는 버릇이 들었나봐요. 간결하게 몇문단 쓰고 말려했는데, 정말 뚱뚱한 글로 찾아뵈었습니다. 내용은 별것 없지만 쓰는 저는 즐거웠으니 늘 그렇듯 내키는 대로 읽어주시길.
다음에도 본 작품이 조금 더 쌓이면 찾아뵐게요.
가을이 시작되었으니 다들 환절기 조심하며 지내시길 바라고… 행복하세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