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알 후기] 氷炭不相容 (feat. 마가의 12형권)

-2023/03/12에 다녀왔습니다.

-당연하지만 시나리오 내용이 있어요.

-氷炭不相容 (빙탄불상용) 은 불을 소인(小人)이나 아첨에 비유한 교훈적 사자성어이지만, 문자 그대로 ‘얼음과 불은 성질이 반대여서 만나면 서로 없어진다.’ 는 뜻이 딱이라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불의 계승자를 모함하려는 의도는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마가의 12형권은 부셈님이 작성하신 무협풍 시나리오로, 동북마가의 후계자인 불의 전승자와 물의 전승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https://twitter.com/scemi_DD/status/1258290017849405441) 시나리오 구조는 모기국 룰에 익숙한 사람에겐 와닿는 장면제 구조예요. 겨울의 도입, 춘-하-추-동의 흐름 끝에 다시금 겨울의 재회 페이즈, 끝내 재회 이후에는 엔딩에서 다시금 춘하추동이 이어지는 세월의 무상함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그야말로 도가적 색채가 짙은 시나리오였다고 해야겠어요. 그러니 이것은 무와 협, 그리고 피고 지는 꽃의 이야기예요.

라이터이신 부셈님의 마스터링으로 다녀왔어요. 저는 여기서 PC2 물의 전승자를 맡았고요! 내용은 조금 개변하여 연인이 아니라 사형제 관계로 다녀왔는데, 처음엔 제 PC를 사형으로 설정했다가 두 사람이 덜 싸울 것 같아서 열심히 싸울 수 있게 사제를 맡았습니다… 죽도록 싸우고 죽어서 돌아왔어요.

처음엔 시나리오 전개 순으로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그러려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마스터께서 주신 후담의 분류에 맞춰 정리합니다! (적고보니-그래도 길어요 죄송합니다)

시나리오, 규칙

위에서 피고 지는 계절과 신록, 꽃의 이야기라고 대충 말해두었지만 이런 무상한 이야기의 참맛은 ‘지나가는 계절이 유난히 가슴에 박히는’ 것이잖아요? 이 시나리오의 구조도 플레이어의 가슴에 시절을 꽂아넣게끔 만들어져 있습니다. 마스터 말씀대로 본인이 동굴 들어가면서 출구부터 막고 걸어나가는 이야기이다보니까… 과거를 이야기하기 전에 현재부터 보여주는 구조예요. 지금의 네가 어떤지 잊지 말고, 다시 과거를 추억할 기회를 주겠으나 다시 겨울로 떨어질 준비를 해라. 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냥 제가 스승님 죽인 캐릭터 PL이라 그럴 수는 있음. 세션 끝나갈수록 죽도록 모진 겨울이)

도입. 이미 PC둘의 스승님은 죽었고, 스승님의 3년장을 마치는 날 마주쳐 비무하는 두사람이 나오거든요. 곡소리나 내야할 시기에 그럴 여유가 없는 두 사람부터 등장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핸드아웃부터 냅다 적혀 있지만, 스승님이 그냥 돌아가신게 아니라 PC2가 죽인 것이니까요. 이때 플레이어들은 이 둘이 과거에 어떤 추억을 쌓았는지조차 아직 잘 모르는 상태로 ‘일단’ 원한으로 뒤얽힌 상황을 연출하게 되죠. 오히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한번 마주하고 나면 춘하추동(과거이야기) 동안 얘네 둘한테 뭔갈 만들어줘야 재밌겠다는 다짐 하나는 확실히 하게 됩니다. 시나리오는 PL을 놀라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PL에게 앞으로 만들고 몰입해야하는 이야기의 방향을 잘 제시해야 잘 만든 것이라고 하잖아요. 마가형권의 도입은 명확히 방향을 제시해주는 표지판입니다.

어차피 누구 하나는 죽을 것 같은데, 역시 죽기 전에 즐겁게 웃었던 추억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도입을 지나며 전 앞으로 이어질 기억과 회상의 페이즈가 일종의 회귀고 윤회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삶이 결코 무상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나는 ‘이 새하얀 세상의 한 점으로서’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 후회없다고 외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종교나 철학은 삶과 사람을 무진장 쿨하게 말하지만 인물까지 실제로 그러면 이야기가 죽지 않겠어요. 비록 그렇게 살아남아서 스승님을 죽이기는 했는데…어떻게든 될거야… 하여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출구를 잘 막고 걸어가면…

춘하추동. 사계절이 시작됩니다. 각각 장면마다 3~4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지만, 장면 이름대로 계절에 맞춰 배경이 나오고 다시, 도입과 같은 겨울에 끝나는 지독한 구조죠. 플레이어 두 사람이 제각각 연출하거나 같이 장면을 만들기 때문에 당연히 몰입이 잘 되기도 하고, 각 계절의 테마에서 두사람의 무공이 성장하는 방식도 규정하다보니 차후 클라이맥스(전투)를 위한 발판도 겸사겸사 쌓을 수 있었어요. 두 사람의 시나리오지만 결국 마가형권이 사명에 적힌 친구들이다보니 언제나 이야기의 중심에 무공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 정말 좋았어요. 무림인에게 무공은 인생이고, 자신만의 화두를 찾는 것은 수련인으로서 필수적인 일인데다가… 그게 그 사람을 규정하기까지하니까요. 캐릭터 어필도 됩니다. (마가형권에서는 이 화두를 ‘협’이라고 합니다. 봤냐? 이게 무협이다.)

하-추 동안 함께 수련기간을 지나면서 전 꼭 이때 배운 무공으로 불의 수호자에게 덤벼야지 하고 결심했습니다. 제가 전투에 미친게 아니라, 분명 그렇게 생각하라고 만들어진 시스템이지 않나. 이미 미래가 정해져 있을 때 과거를 논하는 것은… (스승님 죽인다는 것만 빼면)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아지는 것이잖아요? 비록 제 무덤을 파고 있다고해도 저는 즐거웠습니다. 전 복선회수가 정말 좋거든요. 가상의 인생은 뱉은 말, 걸은 발자국 하나하나가 결말이 된다는 점이 좋은거니까.

이 계절을 플레이어 머릿속에 박아넣는 방법은 협 말고도 규칙상 알차게 들어가 있습니다. 춘, 하, 추, 동을 지날 때마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계절을 한 문장으로 적게 하고, 나중에 그 기억을 소모해서 전투나 조사에서 다이스를 얻게 되거든요. 플레이어에게 필요한 것은 재차 말하지만 끝내주는 연출, 놀라운 설정, 상상도 못한 스토리보다도 자기가 스토리에 참여했다는 증명과 앞으로 뭘해야만 하는지 명확히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이렇게 규칙부터 시트로 시선을 내릴 때마다 ‘내가 뭘 얻고 잃었나'(PC1) ‘내가 왜 이렇게 했나'(PC2)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은 정말 현명하다고 생각했어요. 심지어 제가 직접 짜고 열심히 적어둔 것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단 제 캐릭터의 삶이 이 춘하추동덕에 여기까지 왔겠지만, 신념엔 이미 금이 가 있었으니 이걸 다 번뇌로 만드는 게 좋겠다고 시작부터 마음먹었습니다. (사용할 때마다 기억이 번뇌가 됩니다.)

전투룰 자체가 적은 체력, 한번에 빈사를 만들 수 있는 필살기, 회복기 등등을 기본적으로 잘 갖춘 간단하고 빠른 구조로 만들어진 것도 인상적인데요.(복잡한 리액션과 다수의 옵션등이 적절하게 빠진 것도 굿) 여기서도 앞서 쌓아온 시절로 회귀하거나, 삶의 화두 (혹은 스승님이 제게 주었던 화두)인 협을 마주할 때 강해지는 것도 테마를 결코 놓치지 않는 현명함이에요. 2인 시나리오에서 이렇게 형식적이지 않고 스피디한 전투를 해본게 오랜만이라 참 만족스러웠답니다… 승패를 가리기 위해 죽도록 싸운다고 해도 티알피지의 전투는 결국 룽할 때 룽한 방식으로 마쳐지는 게 제일 중요한겁니다.

인상깊은 장면+캐릭터

이거 고르려고 녹음본 열심히 들었는데 솔직히 못고르겠어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 묶어놓고 6시간짜리 다 들을 때까지 잠도 못자게 하고 싶음. 그 사람한테도 감상문 받고요…

저는 생각나는 것들 후루룩 적습니다.

1. 스승님(마향)과 PC들의 독대

마향은 늘 선문답으로 묻고 답하는 유형의 스승님이에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해하길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닐지도 모르는… 그 늬앙스가 상대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겐 안달나게 하죠. 그래서 그런지 하필 마향과 비슷하게 그런 화법을 주고 받을 수 있는 PC2는 막상 마향과 대화하는 씬이 춘에서 주워질 때와 마스터씬 뿐인데, PC1은 협을 정하는 과정도, 춘에서의 대화도 긴 편이라는 게 정말 좋았습니다. 사람이… 언제나 자기랑 안 닮은 사람 좋아하고, 닮은 애한테는 냉정하게 대할 수도 있고 자기 업을 등에 지우고 싶어하고 그러니까. 그래서 저희집 PC1 강환은 늘 전전긍긍하면서도 마향에게서 뜻을 이어받으려고 하고, 마향에게서 답을 얻으려고하고, 마향에게 인정받고 싶어하잖아요. 끝내는 자신이 마가형권의 제물이 될 뻔한 걸 알고도 마향의 뜻을 목숨을 바쳐 잇고요.

새삼 “허나 젊은이는 그리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같은 말은 연민보다 기대감이고, “스스로를 칼이라고 생각하는거냐?” 는 명백한 동정인 점이 마향이란 인간과 마가형권의 불일치, 불합리, 아이러니를 보여주어서 좋았답니다. 결론적으로 죽어가면서도 강환이에게 도망치라고 한 점이… 마향은 PC2 한권이 아니라, 도리어 제물 삼으려던 강환을 인간적으로 아꼈다고 생각했어요. 마향 본인도 업이 있으니 그런 감정이 결말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곤 생각 안하지만~(오히려 그런 감정을 한번 져버려서 연인을 죽이지 않았나요? 저지른 게 있으니 이번에도 그래야하지요.) 그래서 한권을 플레이한 제 입장에서는 이건 결국 대의 밑바닥에 깔린 동정심, 인간의 마음의 이야기입니다. 그야 마향을 닮으려고 노력하며 롤플레잉하면서도 캐릭터 입에서 “불쌍한 이들이 너무도 많더이다” 같은 말이 나오는 게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강환도 죽을 때까지 다소 의문스러워했거나 사제간의 의무로 여겼을지언정 분명 애가 어른따르는 데에는 나를 살려줄 것 같아서, 내게 잘 대해줄 것 같아서가 무의식적으로 가장 큰 이유니 마향이 적절한 여지를 보여주었겠지요. 마향처럼 도사같은 사람한테 그게 꼭 작정하고 하는 행동이었을리가요…설령 그게 체념 아래 죽은 연민이더라도요.

(+재밌는 점. 결국 강환은 언제나 마향의 선문답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막상 마음으로 해석해서 협으로 만든 인간입니다. 비록 의도였건 아니었건…마향의 진짜 수제자는 누구냐? 하나가 아니라 두사람이 맞다.)

2. 여름과 가을 / 사패천

여름…

다시 들으면서 느낀건데 진짜 둘이 비무하다 장독대나 깨고 달밤에 주먹다짐한 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적어놓기만해도 행복해보여.

가을이 두 사람의 차이점이나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계절이었다면 여름은 그 정반대였죠. 그때까지만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줄은 상상도 못했다~ 같은 연출과 춘에서는 마빡에 목도를 꽂아넣던 애들이 화해를 하는 이야기… 뒷내용을 생각하면 봄여름의 두사람은 역시 자아가 덜 형성된 느낌이 들더라고요.

한권은 이제 가문도 없고, 가족도 없고, 그렇다고 무공을 좋아하지도 않아요. 뭐든 열심히 하고 잃을 것도 없고 머리도 좋으니 어떻게든 되긴 되는데, 앞서 가졌던게 있으니 뭘 해내든 매순간 혼자 살아남은 이유를 알고싶어합니다. 자기같은 사람을 생각하면 또 불쌍하고 돕고 싶긴 해요. 그렇지만 이제 나의 세계는 외딴 동북땅이고…

강환은 원래 가질 수 없던 것들과 가졌지만 잃은 것들만 갖고 있었는데, 이젠 동북마가 하나가 드디어 생겼죠. 이건 내거라고는 못하겠는데 그래도 내 세계는 될 수 있어보이거든요. 여기가 가장 좋은 곳이고, 여기가 가장 감사한 곳이고, 애틋한 곳이면서도, 그렇다고해도 이 세계를 잘 대하는 방법은 사실 모릅니다. 하지만 잘 해보고 싶어요.

공통점은 일단 여기서 뭐라도 해내야 자존감이 남는 애들이라는 거겠죠. 한권은 이와중에 나름 같잖은 동정심과 의리가 생겨 사형을 따르고 (따른 것임) 있었는데 그걸 뭐 살기 바쁜 애들끼리 알아줄리가 있겠습니까… (정정 : 아~ 저것들은 잠도 없어~ㅠ 이씨) 여차저차 싸우고 화해를 해놓고도 “서로 동정하며 삽시다.”했던 한권의 말이 엔딩에 가서야 달성된 것도 참 상징적이에요. 애초에 이미 다 잃은 것들을 기반으로 판단하는 애랑, 이곳을 애틋하게 여기며 아무것도 없던 인생에 쌓아올린 모든 게 소중한 애랑 악수는 해도 손잡고 나아갈 일이 있으면 안되니까…

그래서 사패천이 똭 등장하는 순간 이 모든게 확 터지죠.

(여기서 끝내주는 마스터의 알피… 사패천도 마향만큼이나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둘다 제 캐릭터가 죽였다는 것이 공통점이죠. 사랑해서 죽였다.)

사패천은 살수무리의 대장이랄까요, 그 중 하나인지 몰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강환을 위협하고 애들을 방패삼는 상당히 비열한 싸움을 하던 사내입니다. 그리고 중요하게도 강환의 교육자이자 양육자격인 또다른 인물이죠. 전 결국 끝까지 강환이 자기 보호자격 인물을 죽이지 않은 그 지점이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래야 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고, (사패천은 죽어야죠) 그렇게 되기 위해 희생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니까요. 사패천도 마향도 결국 PC1의 병마에 기여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인 것도 상징적이고요.

강환이 선택한 것은 결국 등 뒤에 있던 아이들의 생존이지 몸에 쌓일 독이 아니고, 스승과 마가의 뜻을 잇는 일이지 마가형권과 함께 죽어가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언제나 뒤따라 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앞선 것이 먼저 몸을 움직이게 했고 마음을 동하게 했기 때문에 나중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게, 정말 ‘불’ 답고 협을 아는 사람 같지 않나요?

그러니 당연히 좋아하는 장면은 의협을 입에 담은 적도 없는 강환에게 그렇게 의니 협이니 따르며 어디까지 사나 보자는 식으로 말하는 사패천일 겁니다. 그것도 죽어가면서요. (전 이런 인간의 알 수 없는 곤조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 말이 자연스럽게 사명을 완성하고 예언해주는 구조라 마스터 말씀대로 정말 신화적이에요. 누가 뭐라건 신화는 반드시 달성되고 (우리 마가형권엔 오디세우스도 없고, 신화시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에 손대는 플레이어랑 마스터가 있어서… 저희가 데우스엑스마키나잖아요.) 달성되게끔 플레이하신 하누님께도 정말 최고의 플레이어 한표를 드립니다.

이 와중에 권은 어린 살수도 베고, 사패천을 죽이며 “지옥에서 보자” 라고 했으니 스스로 자기가 어디까지 왔는지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본래 출발전에 ‘나의 PC2는 신념범이다. 남도 자신도 반드시 살아야 하는 사람은 없고, 반드시 죽어야 할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해야 할일을 할 뿐이다.’ 이렇게 정해두었는데, 그래서 이 시점에서도 나름 도덕도 마음도, 연민도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한 대사였어요. 두 사람의 대립은 여기서 이미 확고하지만요. 그럼에도 끝에나 이때나, 이런 한권이 강환의 생존에 기여했다는 점은 참 재밌는 삶의 아이러니입니다.

살아있으면 기억도 남고, 살아있기에 될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한권에게 이 말은 남았으니까요.

3. 엔딩

법치는 이성이 필수지만 도덕은 결국 인간에 기반해야 한다고, 그 기반이 협인 셈입니다. 더 얕게는 동병상련이 있지만, 같지만은 않아요. 동병상련과 연민으로 살아온 한권은 정말 많은 피를 묻히고 살아오면서도 결국 자기자신을 위한 복수나 은혜는 잊은 지워진 개인이 됐으니까요. (그래서 춘하추동을 다 썼는데, 대비되게 강환은 여름부터 번뇌가 된 것이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협은 무엇이냐…

은원은 반드시 갚는다는 말이 무협에선 꼭 등장하지 않나요? 결국 관계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슴 한켠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살고,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을 품죠. 불가능한 것,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믿는 것을 따라 몸을 불사르는 것은 큰 관련이 없어요. 제가 처음부터 머리로 생각하며 마음을 지운 신념범을 그리려 한 만큼 강환은 정반대로 죽음을 앞두고도 마음으로 살아간 / 도리를 아는 인간이 된 것이 끝까지 대적자를 플레이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여튼 이런 은원으로, 마가의 12형권은 2인 시나리오로도 아주 알맞게 무협을 만들고 맙니다…

마향에게 협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재회페이즈 이후로는 대체로 조금 사람이 메마른? 정신이 나간? 상태였어서 녹음을 통해 기억을 더듬어봤는데 … 끝난 직후에 마향의 “이 모진 겨울이, 끝나지를 않는구나” 하는 대사를 회수하지 못해 후회했던 게 기억났어요. 이제와선 오히려 이쪽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마향의 협은 마가형권이고, 스스로도 강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 그 모진, 겨울을 모질게 만드는 인간성이야말로 진정한 협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둘에게는 맞지 않거든요. 이 둘은 겨울을 끝낼 것이기에 겨울에서만 한참을 살아왔습니다.

죽어가는 권을 처음으로 동정하고, 그를 묻어주고, 그러고도 동북관을 떠나 걸어가는 작은 한점의 연출이 의미하는게 반드시 무상함은 아니에요. 결국 죽은 이들의 무덤 위에도 꽃이 피고 그리워한 얼굴들이 잊히고도 다시 사람은 태어나고, 웃음소리는 넘쳐납니다. 그래서 엔딩의 연출을 들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둘은 결말을 알고 있었을거란 생각을 했어요. 검끝에서 모든 비밀을 짐작했을 때부터, 어쩌면 대장장이의 마을이 불탈 때부터, 어쩌면 사패천의 독공에 당했을 때부터, 어쩌면 동북관에 들어왔을때부터요.

제자가 스승의 경지를 넘어서듯이, 스승님의 겨울은 이미 오래전 끝났던 것입니다.

마스터링

앞에서 간간이 이야기한 것들이 죄다 마스터의 천재성으로 귀결된다는 걸 미리 언급을 하며… 하지만 전 무엇보다! 오로지 사람 한명이 독백으로 이야기하는 예술의 묘리를 엿본 기분이라 좋았답니다. 저는 한때 라쿠고도 들었었다보니, 낭독매체에서 다소 죽을 수 밖에 없는 현장감을 살리는게 꼭 소위 연기력과 목소리와 카리스마뿐이란 말인가… 정녕 그런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티알피지에선 역시 상상력이 가장 좋은 상영매체더라고요. 홀로 다 하지 말고 쉬고 있는 플레이어의 뇌에 영사기를 들이대면서 스크린을 펼쳐보라고 하는 겁니다. 부셈님은 특히 영화 보던 인간이 환장할만한 연출을 많이 해주셨어요. 어떨 때는 짧은 단위의 씬, 어떨 때는 시퀀스를 예정해놓고 정리하는 묘사였죠. 보고 있는 시점이 비인간적이다보니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다 등) 유달리 문장으로 프레임이 만들어진 것 같았습니다. 소설에선 거의 안쓰는 방식이고, 각본에서도 거기까지 세세하게 적은 경우는 드물잖아요. 스토리보드를 문장으로 정리하면 그럴까요? 신기함.

비극에서는 원경이 어울린다고 하신대로 페이즈나 장면의 마무리마다 인물 대신 자연이 주인공이 되고, 인물은 세상의 한점이 되는 초월자의 묘사가 많이 쓰였죠. 설원에 점이 되어가던 인간들을 보면 말그대로 자연대도(自然大道)에 순응하라는 것 같아서 시나리오에도 어울렸습니다. (카메라의 초점이 늘 인물의 표정보다는 두사람의 행동이 이루는 정적 그림과 자연에 있더라고요) 전 혼자서 ‘무협은 소년만화는 아니고 하드보일드지’ 했었는데 그런 장르에선 유달리 클로즈업샷이 잘 안나오기도 하고, 고전영화도 그런 경우가 많아서 홀로 딱 영화본 기분으로 있었네요…

다른 장르를 연출하실 때는 또 어떤 연출을 하실지 궁금해지는데! 뻘하게 비무하다가 무참히 발리고 어느순간 반격하며 끝난 한권의 몽타주씬은 정말 웃기면서도 감동적인 맛이 있어서 좋아했습니다…

사실 그때그때 임시로 만들어주신 대장장이 NPC까지해서 사패천, 마향까지 깊이감이 있는데 막상 등장은 간결한 편이었거든요. 왜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행동이 딱 없는 설정까지 보여주는 (버릇이 확고하거나 외모가 경험을 보여주거나) 캐릭터들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마향은 의뭉스럽지만 악의도 없는 사람이고, 사패천은 악랄하지만 후회없는 인간이고, 대장장이는 처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삶으로도 비굴하진 않죠. 이러저러 짱이었다 밖에 표현이 안 생각나서 좋았던 거라도 말하자면 역시 전…마향이 평상시 짧아진 검을 안쓰던 것이나… 사패천이 살수의 상징같은 클로(이거 아니지만) 끼고 다니던 것이 정말 너무 좋았답니다.

뭔가… 장면연출이나 알피나 호흡조절은 당연히 잘하시는거 자타공인 아실 것 같아서… 사실 제가 많이 좋으면 좋다는 말 말고 잘 생각이 안나서… 선생님은 정말 짱이었습니다.

플레이어/PC…아니 너무 길어졌다

여기서 하려던 이야기… PC1 플레이어이신 하누님의 알피 방식이 언제나 캐릭터만의 고유한 감정선을 캐치해서 안놓치는 방식이라 같이 플레이하면 심장이 울릴 때가 있다… 뭐 이런 거였는데 적다보니 제가 이 헛소리 반 감상 반으로 1만자가 다 됐네요 조금만 줄일게요…

적어두자면 위에서 강환이 얘기를 많이 한 근거 역시 하누님께 있다는 거예요. 그간 강환이란 캐릭터를 장편 팀에서 오래 보기도 했고, 하누님의 플레이방식도 (적어도 PC 강환을 굴리는 방식은) 눈에 익다보니 이번에도 새삼스레 느낀 장점이라고 해야될 것 같아요. 저는 캐릭터 빌딩이 섬세한 사람도 좋아하지만 캐릭터를 납득시키는 방식이 섬세한 사람을 더 좋아하거든요. 강환은 롤에 맞게 하필 권에게 열등감도 있고, 스승님께 감사함과 충성심과 애정 등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고, 또 아이들을 지키는 의외성도 있지만 끝내 사명대로 살며 복수심을 잊지 않는 무인이란 말이죠. 얼핏보면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그 한문장이 단 한번도 흔들리지 않으면 울림이 있답니다. 이 캐릭터가 갖는 생동감이 있다면, 그때 그때 캐릭터가 하지 않을 행동은 하지 않는 걸 넘어서서 감정선을 전개하는 방식에 있을거예요.

납득가능한 인간성이 플레이어의 이해 아래 확고하게 현실성을 가질때 가장 빛이 나잖아요.(저는 언제나 납득 불가의 인간성을 내려놓고 감정선을 보자기짜듯해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게 이번 세션에서도 느낀 점이었어요. 권이 지옥에서 보자 하는 것과 강환이 먼저 가서 기다려라 하는 건 이상하게 차이가 크지 않나요? 적다가 눈물나네 하여튼 그렇다고요. 그건 하누님이 만든 것입니다…

세션 끝내기 싫어서 1만자 떠든 사람같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사실 더 떠들 수 있는데 아쉽네요…읽으시느라도 고생하셨고…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늘 즐거운 티알피지 하시고… 무협세션, 삼국지, 동양궁정물 이런거 하시면 절 잊지말고 불러주세요.

마가형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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